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베르트 슈만 (문단 편집) === 왕성한 음악 활동 === 슈만은 1834년 창간된 "신 음악지(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)"[* 오늘날까지도 발간되고 있다. 지금은 독일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쇼트 뮤직의 후원을 받고 있다. 하여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다.]의 편집장으로서 본격적인 음악평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836년에는 주필이 되어 1843년까지 왕성한 음악평론 활동을 해 나갔다. 1838년, 빈에서 슈베르트의 "큰 C장조 교향곡"[*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더 그레이트를 말한다. 같은해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축소된 형태로 초연했다. 애초 슈베르트 생전에 이 교향곡이 까인 이유는 '곡이 너무 길어서'라고.][* 슈베르트는 C장조 교향곡을 둘(6번과 9번) 작곡하였는데 구별을 위해서 곡이 더 큰 9번을 큰 C장조 교향곡이라 부르고, 6번을 작은 C장조 교향곡이라 부른다.] 를 발굴해서 친구 멘델스존에게 가져다 주었고 독일 음악계에서 신음악지의 영향력은 커져 갔다. 이듬해인 1841년은 "교향곡의 해"로 불리는데 이 해에 교향곡 1번과 교향곡 4번의 초고가 완성되었다. 교향곡 1번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. 그 다음 해인 1842년은 "실내악의 해"로서 "피아노 오중주" 같은 실내악곡들이 작곡되었고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는 등 다양한 작품들로 작곡의 반경이 넓혀져 갔다. 동시에 [[러시아]] 연주여행을 갔다. 1844년,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슈만은 [[피아노 협주곡(슈만)|피아노 협주곡]] 등을 쓰며 작곡에 몰두했지만 점점 정신 이상의 징후가 나타나며 정신의 균형이 무너질 조짐을 보였다. 슈만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[[요한 제바스티안 바흐]]를 연구하며 [[오르간]] 작품들을 작곡했고 1845년에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다. 1848년에는 유일한 오페라 작품인 "게노페파"를 작곡하기도 했다. [[파일:Schumann bipolar disoder.jpg]] Image from Jamison KR. Sci Am 1995;272(2):62-67. 정신 이상에 대해 덧붙인다면, 슈만은 [[양극성 장애]]를 지녔던 대표 예술가 중 한 명이다. 표에 나와 있는 대로, [[조증]]일 때는 무척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지만, [[우울증]]일 때는 작곡을 하나도 못 했던 해도 있을 정도였다. 양극성 장애를 연구할 때 빼놓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이다. 슈만은 우울증과 정신 질환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받았다.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죄인에 형편없는 작곡가라는 소리가 울렸고, 끔찍한 음악 소리도 울렸다.[* 출처: 스티븐 이설리스,《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-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?》- 애덤 스토어 그림, 고정아 옮김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